사람은 의외로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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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과 '발전'의 이분법 뛰어넘기 (5) - 성찰, 온 책임을 다해 함께 사는 일 Open Book Log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발전이고 개발인가] - (5) 성찰, 온 책임을 다해 함께 잘 사는 일

(1) 천의 얼굴을 가진 국제개발
(2) '우리식' 답을 팝니다. 남이야 어떻든?
(3) 발전(development), 개념의 디플레이션
(4) 보이지 않는 사람들, 들리지 않는 목소리
(5) 성찰, 온 책임을 다해 함께 잘 사는 일

Development라는 단어의 해석을 두고 '개발인지 발전인지' 논의가 분분합니다. 이 말이 해석되어 온 역사, 지금 우리 사회가 이를 해석하는 방식을 둘러보며 제 생각을 정리한 글을 공유합니다. 출판 준비중인 글이므로 무단 복제 금!입니다..  


국제개발과 '성찰', 온 책임을 다해 함께 잘 사는 일

2011년 9월의 한국 사회로 돌아와 보자. 국가인권위원회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이 회사의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에 대해 별도의 긴급구제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건이 있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한때 공급이 중단됐던 음식, 의류, 의약품, 랜턴 전지 등의 생필품을 사측이 공급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별도의 인권보호조치가 필요하지 않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에 한국의 시민사회는 인권위의 ‘인권’ 프레임 아래서는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음식, 의류, 의약품 같은 것에 한정될 뿐, 불법한 정리해고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할 권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안전한 주거환경에서 거주할 권리조차 인권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분노했다.

음식, 의료, 의약품 등의 기본적인 요구를 충족하는 것만을 충분한 인권의 보장으로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이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앞서 이야기한 개발도상국 슬럼 지역의 화장실 문제를 바라봐 보자. 앞서 말한 한국의 상황에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면 가난한 나라의 일이라고 해서 꼬박꼬박 요금을 내고 긴 줄을 서서 이용해야 하는 공중변소를 짓는 것 정도로 빈곤층의 고통이 충분히 완화되고 그들의 인권이 실현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슬럼 지역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권, 즉 태어난 곳에 따라 그 가치가 정해지는 두 개의 인권이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국제개발을 빈곤 완화를 위한 활동뿐이 아닌 빈곤의 풍경을 통해 우리가 속한 세계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이라고 함은 이처럼 내 몸의 고통을 느끼는 예민함으로 빈곤한 사람의 고통을 헤아리려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가 아픈 이유가 물질의 부족 때문 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빈곤의 풍경 또한 경제적 잣대만으로 그려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경제적 수치를 넘어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드러나는 빈곤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가장 먼저 필요하다.

이 이해는 빈곤한 사람들이 스스로 정의한 ‘좋은 변화’, 즉 발전을 –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정의한 변화와 얼마나 같던 다르던 – 국제개발을 통해 만들어야 할 공동의 목표로 삼는 데로 나아간다. 이들이 꿈꾸는 ‘좋은 변화’가 우리가 국제개발이라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학교나 화장실을 짓고 우물을 파는’ 등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본권의 충족, 인권의 실현 그리고 부국과 빈국 간의 사회정의를 의미한다면 우리는 주는 것으로부터 함께 사는 것으로 관점을 바꾸고,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사람들이 스스로 정의하고 만들어 가려는 좋은 변화를 훼방하지 않도록 책임 있게 사는 (‘responsible well-being’, Chambers, 2005)데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국제개발이고 협력이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디아스포라의 감수성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작업을 해 온 서경식 선생은 <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이란 책에서 경험의 공동체, 고통의 공통체로서의 ‘우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누가 ‘우리’의 구성원인지는 비슷한 경험을 얼마나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국적, 인종, 언어에 같고 다름에 의해서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20세기를 돌아보면 한국인에게 ‘우리’는 20세기의 정치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제국주의 폭력에 함께 고난을 나눈 자들로서의 우리로 보다 폭이 넓어진다. 한국 사회가 민족이나 언어, 국적보다는 식민지배의 고통과 저항이라는 경험을 ‘우리’의 틀로 삼는다면 재일조선인으로 자라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사람, 중앙아시아에 살게 되어 러시아어밖에 못하게 된 조선 사람, 연변의 조선족 모두 한국 사회 안에서 ‘우리’가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바로 우리를 그렇게 만든 그 역사 속에서 겪은 고통을 바라보고 치유할 힘이 생긴다.

국제개발에서도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과거의 빈곤을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이룬 희망의 상징으로서의 한국이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경험의 공동체, 고통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 공동체 속에서는 과거에 빈곤을 겪는 나라와 현재 빈곤으로 신음하는 나라 간의 시간적 단절이 강조되는 대신 21세기를 사는 한국인과 개발도상국의 빈곤층이 공유하는 아픔이 보듬어 진다.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겪어 온 혹은 여전이 시름하는 문제들 – 경제성장의 불평등, 국가안보를 이유로 침해되는 인권, 불도저식 토건주의, 강대국들의 ‘사다리 걷어차기’ 식 횡포, 재벌로 대표되는 자본의 득세와 노동권의 침해 –과 개발도상국이 겪는 빈곤의 고통 사이의 공통점을 본다. 이처럼 나의 아픈 마음으로부터 너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경험의 공동체, 고통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한국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국제개발협력이 되어야 한다.

반세기만에 최빈국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으로 도약한 개발 경험은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높이고 해외원조사업에서의 점유율을 넓히기 위한 자산이기 이전에, 세상의 가난한 나라들과 경험의 공동체, 고통의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되어야 하는 책무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가진 것은 한국의 개발 경험이라는 ‘주어진 답’이 아니라, 아팠던 경험으로부터 얻은 남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이다.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고 했던 김구 선생의 바람을 다시 떠올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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