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발전이고 개발인가] - (3) 발전(development), 개념의 디플레이션
(1) 천의 얼굴을 가진 국제개발
(2) '우리식' 답을 팝니다. 남이야 어떻든?
(3) 발전(development), 개념의 디플레이션
(4) 보이지 않는 사람들, 들리지 않는 목소리
(5) 성찰, 온 책임을 다해 함께 잘 사는 일
발전, 개념의 디플레이션
개발 혹은 발전이라는 개념이 불러내는 혼란은 비단 한국의 일만은 아니다. 영어 어휘 Development는 발달, 발전, 개발이란 뜻을 모두 담고 있는 데, ‘발달’은 동물과 식물의 생장을 뜻하는 말로 사용범위가 좁혀 졌고, ‘개발’은 불도저 식 도시개발 등의 수사와 어울리면서 긍정적 의미를 상당히 잃은 단어가 되어 버렸다. 국제개발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외국의 도시에서 부동산 개발하는 것”이냐는 질문이 되돌아 오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또 ‘발전’이란 말은 막연하게 긍정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듯 하지만 어쩐지 텅 빈 개념이 같다. GDP (국내총생산)의 증가를 의미하는 경제성장도,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도, 보건소를 늘리는 것도 또 취학률이 높아져서 장기적으로 인간으로써 타고난 잠재력을 실현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도 모두 발전이라고 하면 이 말은 너무 커져서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못하는 개념이 되는 듯도 하다.
Development는 지난 200여 년 동안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이다. 18세기와 19세기는 동물과 생물의 생장을 칭하는 생물학의 ‘발달’ 개념이 사회경제적 ‘발전’ 개념으로 이식되던 시기였다. 이 때 development는 자연 법칙과 같은 필연성을 가지고 전개 되는 역사의 과정을 뜻했고, 헤겔과 다윈을 거쳐 마르크스 정치 철학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또 development은 식민주의와도 연결되어 쓰였다. 발전(development)라는 개념 혹은 지식체계를 거부하는 탈발전론 (post-development school)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한 명인 구스타보 에스테바의 지적처럼 이때의 ‘발전’은 타동사의 의미 ‘발전시키다’의 뜻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으로,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나아가는 행보를 암시했다. 한편 20세기를 거치며 development는 개발의 의미로도 쓰이기 시작한다. 상하수도 시스템을 만들고 마천루를 세우고 주택 단지와 도로를 짓는 일이 도시 개발이란 이름 아래 통칭되었다.
그러나 발전의 의미를 둘러싼 본격적인 각축전은 20세기를 거치며 일어났다. 이제까지 진행된 발전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역사의 진행이 단선적인가 아닌가, 역사가 특정 프로그램처럼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는가에 아닌가 대한 철학적 논의이거나 혹은 식민지 지배를 위한 통치론 이었다면, 20세기에 들어 발전 개념은 서로 다른 두 정치체제의 우열을 가리는 데에 동원됐다. 두 진영의 처방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인가가 development를 둘러싼 최대의 화두가 되었고, 치료의 목표는 경제성장으로 압축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활동이 국제개발이 되었다.
이 같은 변화의 포문을 연 것은 1949년 1월 29일에 있은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취임사였다. 트루먼은 낡은 제국주의에 선을 긋고 과학 기술과 산업화의 혜택을 통해 생산력을 증대함으로써 ‘저발전 (Underdeveloped)’ 지역의 성장을 이끌자는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발전(development)을 경제성장으로 압축하고, 미국식 자본주의가 그 중심 모델이 될 것임을 밝혔다. 이로써 독립과 함께 식민지 발전이 낡은 개념이 되어 버린 자리를 서구식 산업화와 경제성장이란 개념이 대신하게 됐고, 제3세계, 즉 남반구는 이러한 성장을 위한 개입이 필요한 지역, 즉 ‘저발전’ 지역으로 이름 붙여 졌다.
발전의 개념의 넓히기
트루먼의 선언은 곧 국제개발 (International Development)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이제 국제개발은 저발전을 발전으로 이끄는 일련의 개입을 뜻했고, 특히 저발전 지역으로 호명된 제3세계의 저소득 국가에 팽배한 빈곤을 줄이는 일이 학계를 비롯한 국제기구, 비정부 기구 등 국제사회가 풀어야 할 우선과제가 되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초창기 국제개발에서 빈곤은 아직까지 소득의 부족, 곧 금전적 결핍으로만 이해되었고 이에 산업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이 곧 ‘발전’의 유일한 내용으로 자리잡았다. 확실히 이 시기는 정치경제학이 주도했다. 1950년대를 지배한 월터 로스터의 근대화론(각주)이나 이에 대한 반향으로 1960년와 1970년대에 득세한 종속이론 (각주)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발전론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지금까지도 경제학이 국제개발의 링구아 프랑카 (공통 언어기 없는 집단에서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공용어)로 통하는 사정이나, 학제간 (cross-disciplinary) 연구를 기본으로 하는 국제개발학이 발전경제학 (development economics) 그 자체로 오해 받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발전을 동의어로 보는 시각은 곧 도전을 받는다. 거점도시나 산업을 중심으로 중심으로 일단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하면 그 혜택이 농촌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차고 넘친 물이 아래로 저절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확산될 것이라던 트리클다운 효과는 일어나지 일어나지 않았다. 1960년 독립 이후의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GDP의 성장을 경험했지만 농촌 산간 지역은 이런 성장에서 소외되어 오히려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지고 빈곤층이 늘어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빈곤은 GNP의 증가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으며, 발전은 경제학에만 맡겨 놓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이 자랐다. 이제서야 좀더 일찍이 물었어야 했던 질문이 제기됐다. 경제성장만이 답이 아니라면 무엇이 발전인가? 또 누구를 위한 발전이어야 하는가?를 묻게 된 것이다.
발전(development)란 무엇인가? 발전이 지금의 상태보다 좋은 변화 (‘Good Changes’, Chambers, 2005)를 낳는 일이라는 데 반론을 펴는 사람은 없지만, 좋은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우선순위를 두고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 편에서는 GDP 등의 경제적 지표로 측정되는 성장 (growth)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개개인의 역량이 커지고 이로부터 자유가 늘어나는 것을 좋은 변화로 본다.
그런가 하면, ‘좋은 변화’, 즉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측도 있다. 발전은 저발전의 대응 개념이므로 발전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빈곤과 저발전을 실재하는 것으로 전제하며 서구중심주의에 근거한 남반구에 대한 북반구의 개입을 정당화 한다는 논리에서다. 요약하면 무엇이 발전인지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는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트루먼의 선언 이후 반세기 동안 국제개발이 논쟁을 거듭하며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이기도 하다. 이는 국제개발은 빈곤 완화를 위한 활동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연구와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데로 이어진다. 무엇이 발전인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하는 만큼 특정한 발전론이 어떻게 구성되며 누가 이로부터 영향을 받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학문으로서의 국제개발학 (International Development Studies)은 이 같은 논의가 펼쳐지는 장이다. 세상에는 경제성장으로 함축되는 하나의 발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발전담론들(Development Discourses)이 존재하며 이들 각각은 특정한 인식론과 세계관에 바탕해 있다.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자연과학, 공학 등의 학계와 UN를 비롯한 국제기구,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정부 기관 등 이른바 국제개발 커뮤니티를 이루는 구성원 모두가 빈곤 완화와 성장을 위한 저마다의 처방을 제시할 수 있지만, 어떤 구성원도 그 스스로 각자의 처방에 깔린 발전에 대한 이해 자체를 주된 분석의 대상으로는 삼지는 않는다.
이를 테면, 건강에 대한 저마다의 각기 다른 이해를 바탕에 두고 각기 다른 처방전을 발행하는 셈이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각각이 처방들이 약속하는 ‘건강’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이에 대해 토론하며, 각각의 처방이 야기할 수 있는 부작용을 짚어 볼 수 있는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더 촘촘한 세계화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그 열매를 가져다 줄지, 생태계를 변형하는 토목 개발이 그 지역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훼손하지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닐지, 원조와 자유무역에 관한 국제협약이 목화나 곡식을 생산하는 가난한 나라의 농부의 생계를 위협하지는 않는지를 미리 짚어보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러 학문 영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발전과 개발 정책은 지식과 자원에 우세한 선진국들의 이해를 반영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를 개발도상국, 그 중에서도 빈곤층의 입장에서 짚어보고 이들은 보호하거나 지원할 대책을 세워야 하다.
국제개발학 (International Development Studies)은 이 같은 필요에서 생겨난 학제를 아우르는 (Cross-disciplinary) 지식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경제성장으로 축소된 발전 개념에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학문적 배경으로부터 다양한 발전담론들 (Development Discourses)을 생산하는 학문,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 (‘good change’, Chambers, 2005)’를 약속하는 여러 개발 주장들에 깔린 다양한 프레임을 읽어 내고 그로부터 누가 이익을 얻고 손해를 보는지 혹시 발전의 행로에서 배제되거나 손해를 보는 인구 집단이 없는지를 빈곤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비판적으로 살펴보려는 노력이 학제와 학과를 갖춰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는 국제개발이 빈곤완화를 위한 자선(charity)활동만이 아니라 발전 의미를 다시 묻고 넓혀 가는 작업이면서, 부자와 가난한 나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는 작업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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