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발전이고 개발인가] - (2) '우리식' 답을 팝니다. 남이야 어떻든?
(1) 천의 얼굴을 가진 국제개발
(2) '우리식' 답을 팝니다. 남이야 어떻든?
(3) 발전(development), 개념의 디플레이션
(4) 보이지 않는 사람들, 들리지 않는 목소리
(5) 성찰, 온 책임을 다해 함께 잘 사는 일
'우리식' 답을 팝니다. 남이야 어떻든?
개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철학은 이른바 국제개발협력의 ‘한류’ 논의에서도 그 한계가 드러난다. 국제개발협력의 ‘한류’ 논의는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신에 성공한 이른바 ‘희망의 롤모델’인 한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에 대한 세계원조사업의 새로운 주도권을 갖는 국가가 되겠다는 외교적 포부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지나온 개발 경험을 되짚어 보기도 전에 우리의 개발 경험을 ‘주어진 답’으로 국제 사회에 알려서 한국의 자리를 다지는 데에 급급하다는 데 있다. 이렇다 보니 개발도상국의 상황에 맞는 개발협력을 추진하기보다 한국의 리더십이 확장이 주가 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량 불안에 대응하는 국제개발 활동을 예로 들어 보자. 상식으로는 ‘작으나마 제 땅을 갖고 농사를 짓는 소농들이 왜 가장 심각하게 굶주림의 위협을 받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일 것 같다. 아프리카 인구의 70%가 작으나마 자신의 땅을 갖고 농사를 짓는 소농임에도 식량이 없어 굶주림을 겪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런 질문으로부터 낮은 농업 생산성, 미비한 곡물 시장 발달, 선진국 기업의 곡물 투기, 바이오 연료 등의 에너지 문제 등을 우선 짚어보고, 현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 후에 한국 정부와 NGO가 할 수 있는 협력 사업을 찾아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그 사정에따라 파트너국가의 사정에 따라 농업기술 자문이나 곡물 유통을 위한 도로가 필요할 수도 있고, 현지 농민들에게 염소나 돼지 등의 가축을 지원할 수 있는가 하면, 개발도상국 농민에게 위협이 되는 한국의 농업 정책을 개선하는 것이 파트너 국가에는 우리가 주는 물리적 지원보다 절실한 일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국제개발협력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대신 우리가 갖고 있는 답에서부터 출발한다. 식량불안과 농촌개발이란 문제가 있다고 하면 이에 대한 답으로 우리 식의 답 – 새마을 운동을 제시하고는 이를 전수하기 위한 일연의 개발 원조 프로그램을 짜는 식이다. 식량불안이라는 상황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우리가 가진 답을 전수하는 데에, 즉 한국의 개발 경험을 브랜드화 하는 데에 치중한다. 문제는 이 같이 ‘주어진 답’을 나누는 국제개발협력이 개발도상국 파트너국가에서 보자면 일방적으로 만병통치약을 선전하는 것으로, 파트너 국가가 원하는 해결책을 이야기하는 대신 한국이 원하는 근시안적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으로 비춰진다는 데 있다.
한국 경험의 성공담만 강조하고 실패로부터 얻는 성찰을 나누지 않는 태도로는 국제사회에서도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한국의 새마을 운동은 이는 농촌 공동체의 협력 정신을 강조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인상 깊지만 유교사상, 군사주의, 군입대제도 등과 같은 한국의 특수한 사회문화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이를 케냐에 그대로 옮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한 은고비 키타우 (Ngovi Kitau) 주한 케냐대사의 발언 (2011년 5월 한국 ODA 국제 컨퍼런스)은 이런 사정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다. ‘주어진 답’을 선전하는 식의 개발협력은 한국의 시민사회와 개발도상국의 빈곤층이 함께 문제를 공유하며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식량불안만 하더라도 이는 오롯이 가난한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녀름 농업농민정책연구소에 따르면 2010년 현재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곡물기준으로 30%이며 사료용 곡물 수요를 제외하고 칼로리 차원에서 환산하더라도 44% 정도로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해 최하위 수준이다 (칼로리 기준으로 호주 173%, 미국 124%, 영국 65%).
이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식량자급율 대신 ‘자주율’이란 개념을 들어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다. 국내 생산과 해외 수입량을 합산하여 생산량으로 환산하는 식량자급율이 식량안보 (food security)의 안전성 기준이며 국가별로 지표화되어 국제적으로 사용하는 통계임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을 우리 기업의 해외 농장 개발이나 해외 곡물회사에 대한 투자 등을 통해 생산, 조달하는 물량을 포함하는 ‘곡물 자주율’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 개념이 영세농과 소규모 자영농이 주축인 국내 농업을 포기하고 식량안보를 기업의 손에 내맡기는 과정, 즉 신자유주의 자본화의 최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무관하지 않음을 이해할 것이다.
한국 시민들의 밥상이 고도로 자본화되는 과정은 우리가 국제개발협력을 통해 돕고자 하는 개발도상국, 특히 그 나라의 소작농들의 삶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최근 국제개발협력에서 눈에 띄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농업 투자, 그 가운데서도 해외농장개발이다. 농협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01년 5 기준 해외 농업개발에 진출한 민간기업 (단체)은 73개로, 브라질, 캄보디아 등 18개국에 진출해 2만3,567㏊를 경작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18개 단체가 정부의 ‘해외농업개발 자금’을 지원받고 국제개발협력이란 이름을 내걸었다.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저부가가치 산업인 농업을 ‘농업의 지리적 전문화’를 통해 인건비와 토지가 싸고 수자원 등의 이용이 용이한 개발도상국에 아웃소싱하는 한편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 집중한다는 논리다.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을 식량창고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책은 이들 나라들의 소농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오랜 세월 동안 작은 땅덩이에 옥수수나 밀을 키우면서 생계를 이어 온 영세 농민들이 쫓겨난 땅을 외국인 소유의 기업형 농장이 차지하게 된다. 아프리카의 경우 이런 소작농이 인구의 70%를 차지하고 이들이 농업생산량의 60%를 책임지고 있으니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정부는 이를 외국 자본을 빌러 낮은 생산성으로 고전하는 농업 분야를 일으켜 세울 절호의 투자 기회로 생각해서 환영한다. 에티오피아의 경우 1억 1천 100만 헥타르의 ‘남는 땅’을 외국인에게 임대할 계획인데, 이렇게 되면 영세 소작농들이 일구는 소규모 옥수수 밭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지라는 보다는 골칫거리로 전락한다.
농민들이 땅을 내주고 나가야 외국 회사들이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때문에 움직임을 해외농업투자가 아닌 소작농과 저개발국에 대한 선진국 자본의 농지 수탈(Land granb)로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2009년 세계식량농업기구(FAO)가 국제농업개발기금(IFAD)과 세계 곳곳의 해외 농지 투자 실태를 조사해 ‘토지 수탈인가 아니면 개발기회인가?'이란 제목으로 출간한 보고서 또한 이와 입장을 같이 한다. 협상의 단면을 들여다보면 무상과 다름없는 '수탈'이라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개발도상국과 투자자 간의 계약이 동등하지 않는데다, 토지 협상이 50년부터 99년에 이르는 장기 계약이며, 경작 또한 단기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화학비료를 사용하고 수자원을 과도하게 쓰는 단일 경작식 집중 농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토지 황폐화와 물부족 현상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너무 영세해서 땅에 대한 공식적인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인 소작농들이 생계 수단인 땅을 잃고 한계 상황으로 더욱 내몰리는 상황을 경고한다. 물이 부족해서 농사를 짓기 힘든 중동의 산유국들이 앞다투어 투자한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과도한 식량 수출로 인해 자국의 국민들의 굶주리는 상황까지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FAO(유엔식량농업기구)의 Jacques Diouf 의장은 "신식민주의"란 말을 들어 이 같은 현상의 위험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국 기업 대우 로지스틱스가 추진했던 마다가스카르 농지 임대 계약은 이와 관련해 회자된 유명한 사례다. 이 계약은 영국의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즈 (FT) (2008년 11월 19일)를 통해 알려졌는데, 이 기사는 대우 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르에서 옥수수와 팜 오일 생산을 목적으로 130만 헥타르(경상남도 면적의 1.3배)의 토지를 99년간 임대하는 추진중이라며 이는 2008년 식량위기 이후 전 세계에서 이루어진 토지 임대 계약 가운데 가장 규모라고 보도했다. FT는 대우가 마다가스카르에 거의 공짜로 토지를 빌리면서, 고용창출, 도로 등 제반 인프라 건설 등의 투자를 약속했지만 계약에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포함하지 않았으며, 계약 당사자들 간의 협상력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한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할 수 있는 계약임에도 계약체결까지의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인구의 인구의 3.5%가 세계식량프로그램(WFP)의 구호식량에 의존하고 3세 이하 유아의 약 50%가 영양 결핍으로 인한 성장 장애를 겪고 있는 나라에서 외국인 기업의 팜 오일 생산을 위한 식량기지를 건설하는 것의 윤리적 정당성을 물었다. 이 보도는 마다가스카르 안팎에서 논란을 낳았고 급기야는 이 나라의 정권 교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계약 체결이 무산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해외농지개발을 둘러싼 이야기는 한국에 사는 우리의 식량안보 문제가 개발도상국 농촌 지역의 소작농의 삶과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한국의 소규모 영세농이 거대 기업농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농업 정책 하에서 아래에서 농사 지을 땅을 잃는 과정과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소농이 경작하던 땅에서 내몰리는 과정이 다르지 않다.
이들 모두 농업의 기업화 및 자본집중화로 요약되는 신자유주의 농업 정책의 단면들이다. 이로 인해 식량안보가 불안해지는 것도 한국과 아프리카 모두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우리의 국제개발협력은 동시대는 살며 함께 겪고 있는 고통을 보는 대신 한국와 개발도상국의 ‘시차’만을 바라보며, 산업화와 더불어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농업이 기업화되어 가는 과정의 일환으로 진행된 새마을운동을 가난한 사람의 농촌 개발을 위한 ‘답’으로 제시하는 데 급급하다. 이것이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겠다며 이야기하는 국제개발협력의 모습이어야 할까.
부동산이나 자원개발, 원조시장에서의 이권을 위한 활동 등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국제개발협력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촉진하는 개입으로서의 국제개발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은 ‘주어진 답’ 아니라 ‘질문’에서 시작한다. 아프리카 인구의 70%에 이르는 소작농들이 농사를 지으면서도 왜 굶주림을 겪는가라는 질문은 농업 부분의 공공정책, 계절변동이나 기후변화, 낮은 농업 생산성을 개선하려는 NGO 들의 활동을 아울러 볼 수 있게 하는 창이자, 개발도상국의 소농과 선진국의 식량소비자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주는 입구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진 답’을 제시하기에 바빠 이 질문들을 함께 사유할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답을 나누는 데 급급하기보다 긴밀하게 이어진 세계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에게 국제개발협력은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인 동시에 한국의 개발 혹은 발전 과정에서 미쳐 묻지 못한 물음들을 다시 묻고 우리 스스로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첫 걸음은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미처 충분하게 사유하지 못했던 개념이자 서구식 자본주의가 그 뜻을 경제성장만으로 폭력적으로 축소해버린 개념인 ‘발전’이 무엇인지를 다시 살피는 데 있다. 우리가 되찾은 발전에 대한 이해로부터 이를 촉진하는 활동인 ‘개발’의 내용이 다시 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발전을 빈곤과 박탈, 소외를 없애고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타고난 잠재성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개발은 바로 그런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개입하는 행위, 보다 구체적으로는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세계화와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피해를 보지 않도록 특별히 이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발전을 내부에서부터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개발을 외부에서 타의적으로 부여되는 결과로 보고 개발활동을 거부하는 시각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부동산이나 자연자원 개발 사업쯤으로 축소되고 혹은 ‘MB스러운’ 것으로 오염되어 버린 ‘개발’이란 말에 겨눠지는 의심을 기꺼이 끌어 안고 간다. 개발이란 말을 버리는 대신 이 말에 대한 불만과 의구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런 의심과 회의를 옆에 두고 발전이란 무엇인지 누구를 위한 발전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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